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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팁·아이 공부

부부가 함께 '82년생 김지영'을 보면 좋은 이유

나는 2016년에 아이를 낳았고, 마침 이 소설이 출간된지 얼마 안 됐을 때 책을 읽었다. 그때 내 맘속 분노와 우울감, 무력감의 근원에 대해 차근차근 이해할 수 있었고, 큰 위로를 받았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았던지 이내 이 소설은 아주 큰 인기를 끌었고, 올해 영화로 만들어져 상영되기도 했다. 

'82년생 김지영'이 불러온 변화는 상당했다. 이 책의 카피처럼 모두가 알고 있지만 꺼내기 불편했던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고, 여러 매체에서 회자되고, 사회적인 분위기도 조금씩 달라지는 걸 느꼈다. 예상했던 것 보다 더 이 이야기를 싫어하고, 부인하며 조롱하는 사람들도 많아서 놀랍기도 했다. 이제는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선호도가 그 사람의 가치관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처럼 되어버린 것 같다. 

신랑이 먼저 '82년생 김지영'을 같이 보자고 했을 때 무척 반가웠다. 그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할까 몹시 궁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듣고 싶지 않은 말을 할까봐 겁이 나서 선뜻 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화를 함께 보고 나서 우리는 정말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진심으로 소통하는 기분을 느꼈다.

 

82년생 김지영 영화 포스터, 배포 이미지

 

 

 

'82년생 김지영'이 우리 부부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우리는 각자 여자로, 남자로 이 사회와 가정, 출산과 육아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이 영화와 우리의 지난 4년의 시간을 비교해 보며 많은 대화를 나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겁고, 먹먹했고, 나는 처음부터 눈물이 날 거 같더니 결국 터져버렸다. 나의 눈물을 이해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같이 화내기: 아악,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김지영이 다니는 회사에는 유능한 여자 팀장이 팀원들과 함께 고객사와 미팅하는 장면.

회의실 커피 셋팅은 여사원들이 도맡아했고, 회의가 시작되기 전 고객사 이사(?)가 전혀 웃기지 않은 농담을 웃으면서 건넨다. 

"애들은 엄마가 키워야지. 안 그런 애들은 언제 잘못되도 잘 못된다니까."

이 대사가 나왔을 때 신랑과 눈이 마주쳤고, 같이 소리를 질렀다. 아악. 왜 저래. 

극중 김팀장은 출산 후 한 달만에 복귀해서 열심히 일하고 출중한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회사에서조차 엄마로서 평가를 받는다. 나 역시도 회사에서 이와 비슷한 농담인지 악담인지 알 수 없는 괴상한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무슨 학원에라도 다니는 것처럼 대사도 어쩜 저리 하나같은지~ 가뜩이나 아이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안쓰러운 워킹맘의 죄책감을 후벼판다. 정색하고 받아치면 나오는 대사도 똑같다. 

"아우 무슨 말을 못해~"

그러니까 아무말이나 하지 마시라고요~ 제발. 

 

영화 소개프로그램 캡처 이미지

 

 

워킹맘이 회사에서, 집에서 얼마나 바쁘고 고되게 시간을 보내는지 신랑과 나는 잘 알고 있다. 신랑은 나의 고달픈 워킹맘 생활을 충분히 알고, 짜증을 다 받아주고 힘껏 응원해 주었지만 역시 겪어내고 있는 나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그 점이 억울하고 못내 속상했다. 다시금 그때 느꼈던 서운함을 토로했고. "그래. 니가 고생 많이 했지." 라는 말로 조금 위로를 얻었다. 

 

>이해하기: 너도 그랬어? 미안해. 몰랐어. 

극중 김지영은 김팀장을 롤모델로 삼고, 자신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도 회사를 계속 다니면서 열심히 일을 할거라고 다짐한다. 5년 전의 나처럼. 그리고 나처럼 복직하지 못한 채 독박육아에 시달린다. 아이 낳은 첫 해는 정말 힘들었다. 잠을 푹 자지 못했고, 출산 후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아이를 돌보느라 여기저기가 쑤시고 아팠다. 엄마가 처음이니 서툴고 초조해서 아이를 힘들게 할 때마다 내 마음은 더 괴로웠다. 나는 이렇게 많은 것이 변해버렸는데, 신랑은 아무 타격감 없이 자신의 사회생활을 이어가는게 부럽고, 화가 났다. 그래서 신랑에게 얼마나 모진 말을 많이 하고, 짜증을 냈던지. 나는 김지영과는 달리 감정을 다 표출하고, 착한 아내 노릇은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조금은 빨리 그 우울감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영화소개프로그램 이미지 캡처

 

나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데, 신랑은 그랬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때 본인도 너무 힘들다고 했으면서 말이다. 이제 막 아이를 낳고 힘든 육아를 견디고 있는 엄마들에게 얘기해주고 싶다. 신체적인 부담이든 감정적인 부담이든 다 신랑과 함께 나누라고. 물론 그러자면 엄청 싸워야 하고 번거로운 일이 많다. 나보다 무디고 덤덤한 신랑을 섬세한 육아의 세계로 끌어들이려면 분명 그에 따른 스트레스가 생긴다. 아마 시종일관 맘에 안 들것이다. 그냥 내가 하고 말지 하고 넘기다 보면 겉으로는 평화로운 부부 생활처럼 보이겠지만, 내 속이 곪고 또 곪아서 영혼 없는 부부 생활이 되어버린다. 그보다는 그때그때 사소한 일이더라도 할말은 하고, 싸울 일은 싸우는 편이 낫다. 나는 그렇게 전쟁처럼 영유아기를 보냈는데도 지금 신랑이 별로 괴로운 기억으로 갖고 있지 않다. 이렇게나 단순하다. 그러니 관계가 악화되기만 할 거라고 미리 걱정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젠더 감수성 일깨우기: 진짜야? 이런 일이 있다고? 

김지영이 버스에서 자신을 성추행하는 남학생 때문에 곤란해하자 버스 안 아주머니가 나서서 구해주고, 정작 연락을 받고 달려온 아빠는 딸을 꾸짖는다. 

"행동 거지 조심해!" 

신랑은 이 부분을 몹시 이상해했다. 분명 딸의 잘못이 아닌데. 

이런 일은 굉장히 흔하고, 나도 겪은 적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신랑이 짐짓 놀랐다. 버스에서 성추행, 일방적인 구애 후 해꼬지, 화장실 몰카, 단체 채팅방 성희롱 등 여자아이가 태어나서 아주 어릴 때부터 겪어야 하는 피해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런 일을 겪고도 쉬쉬해야 된다는 점도. 

"너는 한밤중에 길거리를 다니더라도 신변의 위협을 느낀적은 없잖아."

남자와 여자가 가진 신체적 차이로 훨씬 더 조심해도 공포감을 많이 느끼면서 생활할 수밖에 없다는 점도 일러주었다. 인터넷 상에서 남녀차별이니, 남성을 가해자로 몰아간다느니, 여성이 먼저 여지를 준 게 아니냐느니 하는 식의 의견으로 논란이 되는 부분도 젠더에 대한 감수성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해한다고는 하나 실제 어떤 느낌으로 생활을 하고 있는지 대다수의 남자들은 알지 못한다. 신랑도 그랬고, 아마 평생 경험할 수 없겠지. 내가 타인이 되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미루어 느끼고, 내 것 처럼 받아들이기. 내가 아들을 키우면서 가장 길러주고 싶은 부분도 바로 이런 감수성, 특히 젠더 감수성이다. 

 

https://youtu.be/42tj7qqJyTY

유튜브 고잉투파의 82년생 김지영 리뷰, 같은 또래 여성 3인의 리뷰라 더 와닿는다.

 

 

>공감하기: 맞아. 나도 결혼하고 나서 첫 명절 때 느꼈어. 

시댁과 우리집의 분위기는 완전 다르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니 제사는 일절 없고, 2남 1녀의 늦둥이로 태어난 신랑은 '남아선호'를 전혀 느끼지 못한채 자랐다고 한다. 우리집은 전통적이고 가부장적인 질서를 몸소 실천해온 아빠와 순종적인 엄마가 만나 그대로 살았고, 큰딸은 살림밑천이라는 옛말에 따라 온갖 집안일은 내몫이었다. 일찌감치 독립을 하면서 기존의 질서에 반항하는 딸이 되었지만 엄마와 아빠는 오랜 세월 그렇게 살아오셔서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 

신랑은 결혼하고 첫 명절에 혼자 음식 준비를 다하시는 우리 엄마를 보고 안쓰러워서 산더미 처럼 쌓인 설거지를 하겠다고 자처했다. 신랑이 나서면 남동생과 아빠도 조금은 움직일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어찌보면 자기도 손님인데 기분이 많이 이상했다고 했다. 수많은 며느리들이 명절에 느끼는 바로 그 감정이다. 

 

영화소개프로그램 이미지 캡처

 

 

>위로 받기: 남자들이 기득권을 내려놓고 싶지 않은 거야

신랑 덕분에 지금은 우리집도 분위기가 슬슬 바뀌고 있기는 한데 한참 멀었다. 여전히 우리 아빠는 대접받아 마땅한 가부장이다. 여전히 명절에 며느리가 부엌에서 일하는 건 당연하고, 시댁 먼저 가고, 친정은 명절 제삿상을 다 무르고 나서 간다. 나는 비록 제사가 없는 집에 시집을 왔지만 어머니나 형님이 움직이실 때마다 안절부절 쫓아다니게 되는데 다른 집은 오죽할까. 반대로 사위가 처가에서, 혹은 아들이 본가에 와서 나서서 집안일을 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지 않은가. 처갓집 와서 설거지와 집안일 좀 해본 신랑이 말했다. 

"남자들이 편하게 잘 살았잖아. 그 기득권을 내려놓고 싶지 않은 거지."

신랑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더 통쾌했고, 큰 위로가 되었다. 상위 1%의 부자들이 부를 세습하면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갖은 수를 다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자들은 예부터 가져온 기득권을 내려놓지 못한다. 본인이 기득권층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다. 그걸 인정하는 순간 집안의 풍경을 좀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생색 내기: 그래도 내가 공유보다는 낫잖아! 

김지영은 소파에 편히 앉아 있지도 못하는데, 남편은 소파에 앉아서 안쓰러운 시선으로 아내를 바라본다. 그저 바라보고, 미안하고, 고맙다. 처음 가족계획을 할 때도 남편은 아주 해맑다. 내가 기저귀도 갈고 우유도 주겠다며. 아주 잠깐 그 해맑은 얼굴이 공유라서 껌뻑 넘어갈 뻔했다. "뭐 애 하나 생긴다고 크게 달라지겠어?" 하면서 웃는데 나도 모르게 "어머, 그래." 라는 대답이 나와버렸다.  

 

예고편 캡처 이미지

 

 

 

 

신랑이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부친다.

"진짜 너 저런 남편이랑 살 수 있어?

아내가 뭐 때문에 힘든지도 모르잖아. 공감 제로에, 집안일도 하나 할 줄 모르고, 저렇게 해도 된다고??!!"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 아주 혼구녕이 났다. 이 영화의 유일한 비현실은 남편의 얼굴이 공유라는 거다. 조금이라도 비난을 피하고자 공유를 섭외한게 아닌가 싶다. 사실 현실에서는 아이 목욕시켜야 겠다고 서둘러 퇴근하는 남편도 보기 드물긴 하다. 아내가 빵집에서 알바라도 하고 싶을 만큼 답답해 하고 있다는 것도 눈치 못 챌 정도로 무딘 사람은 흔하지만. 그러니 아직은 갈 길이 멀다. 부부가 함께 육아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대화를 나누고, 일방적으로 커리어를 포기하고, 희생하게 된다면 당사자의 감정을 돌보고, 함께 대안을 찾아봐야 한다. 

 

>적용하기: 우리 어떻게 할까? 

영화는 나름 해피엔딩이었다. 김지영이 세상을 향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남편은 육아휴직을 내 가사와 육아에 참여하며 김지영의 꿈과 일을 지지한다. 영화처럼 우리의 생활도 보다 나은 방향을 찾아 나아갈 수 있을까?

육아휴직 -> 복직 실패 -> 이직 -> 퇴사 -> 이직 -> 퇴사 -> 이직 -> 퇴사

나는 이미 쓸 수 있는 패를 다 써버린 느낌이다. 복직에 실패한 후로 세 번의 이직과 세 번의 퇴사를 거치면서 이미 이력서는 너덜너덜해졌고, 이제 더이상 나를 불러줄 곳도 없다. 마지막 퇴사는 신랑이 먼 곳으로 이직하면서 육아에 전혀 참여할 수 없어서 내린 결정이었다. 혼자서 감당하다 보니 몸이 너무 힘들었고, 결정적으로 아이의 불안 증세가 우려할 정도로 심해졌다. 그래도 이게 최선일까? 꽤 여러 번 고민하고, 같이 이야기 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 지금은 실업급여를 받으며 나의 다음 노선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다. 

그동안 많은 대화를 나누었기에 신랑이 나의 상황과 감정에 대해서 충분히 안다고 생각했다. 신랑이 호기롭게

"네가 일을 다시 하면 이번엔 내가 육아휴직을 낼게!"

라고 말했을 때 나는 또 발끈했다. 지금 장난하냐고, 내 커리어는 만신창이가 됐는데 그런 제안은 희망고문이라고. 단절된 경력을 어렵게 이어온 터라 진급도 밀리고, 연봉도 내내 제자리다. 아마 대부분의 가정이 복직한 아내의 연봉에 의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지 않을까? 어차피 회사원도 평생 직장 없고, 중간 관리자급이 되면 되려 진로 고민을 해야 되니까 나는 좀 미리 그 고민을 하는 거라고 스스로 애써 찾은 평정심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신랑은 잔뜩 상기된 나를 보고 미안하다 얘기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내 잘못은 아니지 않느냐고. 그래, 너의 잘못도 아니고, 나의 잘못도 아니지. 그러니 누구에게도 부담을 더 주지는 말자. 

신랑은 내 덕분에 아무 지장 없이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나는 육아와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준비하고, 공부하기

그 과정에서 신랑은 내 의사를 존중하며 적극 지원하기

우리는 지금 체념과 수용, 탐구와 지지의 단계에 와 있다. 우리 아이가 자라서 부모가 될 때는 보다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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